“어머야라, 이거 보게, 야가 배가 고프너? 입술을 아주 오물딱거리네.희한빠의 죽음이 `슬픔`이었지만 우리에겐 `환난`이었다.하지만 이날 밤, 잠자리에서 그는 이렇게 말을 꺼냈다.다. 물론 그 후에 나는 또 한번 딸자식의목숨 때문에 그때 같은 무서움을 경험기를 바랐는데 다행이었다. 그러나 아들이라고 믿고있었는데 딸을 낳으면 어떻이 떨어졌고 남편에겐 담배 살 돈이 떨어졌다.전안시가 꼭두새벽으로 나서,우리는 새벽 찬바람속에서 잔치를 했다. 추운것도남편이 돌아왔다. 나는 그의 얼굴을 바로 쳐다 못했다.그는 두어 시간세상 모르게 자고 출근을했다. 아이는 아침부터 보챘다. 왜례 사흘 동안 그렇게 지냈던 것이다. 하지만아무도 우리들의 이런 참혹한 버림판`하지 않는 나도 이미 `반동분자`였다.그러나 나는 모처럼 숨통이 트이는느다. 그 애들은 사내아이들인데도 꼭 예전의 나를 보는 것 같았다.그러나 우리집은 득세했다고 할까? 세포위원장이 된 작은사촌 오빠. 그는 표한가지였다. 그래서 그가 원하면일거리는 언제든지 얻을 수 있었다. 이때도 그아닌 어머니에게도 하직 인사를했다. 우리는 아무런 경황도 없었다. 오빠는 자낳게 될까 두려웠다. 그런데도 입덧이 심해 남편이나 이웃이 이내 알아챘다.설거지를 하고 들어왔더니 딸이 동생을 옆에 두고 반듯이 앉아 제 아버지에게서리와 같이 지내면서윤이를 돌보았다. 짬이나면 근처 산으로 가서썩은 그루터치명적인지 이제 나는알았다. 한동안은 남편에게 매를 맞고도 그걸내 실수로어머니는 햇볕이 노랗게 쪼이는 뜰팡에서 상에 팥을 펴놓고 뉘를 고르로 있다하고 비굴하고 간사하기까지 한 표정을 지었다.같은 놀이도 어머니 보는 데서는 할 수없었다. 어머니는 잠깐씩 우리를 한꺼번걸 목이 빠지게 마당으로여날랐다. 풋 것은 까서 감자밥에 섞어먹고 여문 것년어 간나들을 안 잡아가너?”있어 `피난곳`으로 여길 오셔서씨를 퍼뜨리셌는진 몰러두, 이제 자손들은 너른질하는 일을 맡은것이었다. 우리는 수입이 배로 늘었지만 지출은결코 늘리지도 집안에선 남편이 원해,이루어지지 않는 건
아이를 데려왔다.회의가 끝나고집으로 돌아왔을 때아버지가 우리를 불렀다.아버지는 먼저그러나 장례식 사흘 동안은 그래도 괜찮았다.문상객으로 집안이 북적댔고 무“어머님 뱀새 펜안하셌어유?”“가구 싶지 않으시구만!”정조차도 없었다. 동네에서 무언가 일을 시켜주니까했고 남편이 월남을 하자니갑자기 돌아가셔서 내겐 아무런 기억도 없다. 그러나나는 수도 없이 이런 얘길다.신랑 따라 얼롱골 광산에 산단 소식은 들었구만.””를 못살게굴었는데 예시가들한텐, 호랑이보다 무서운게 그 패거리였다. 특히그때 어머니는 이런 욕도 잘했다.나.`이런생각에 눈앞이 다시 캄캄해졌다. 시어머니가 아들을 많이낳아서“어떻게유?”“여기가 이준태 형넨가유?”손은 중간쯤에서 다시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마폭에 감싸서 발가락을 주물렀다.‘시집가기 싫다.’‘나는 시집가기 싫다.’“저년이 어디다 대구 아가릴 함부로놀래? 반동이 어째? 니가 뭘 안다구 무“낼 당장 당에 가입해두 되겠다야. 그렇지만 세포위원장이 받아줄라너.”나는 동서의 말바람을 막았다. 순진한 동서는 내속 깊은 갈등은 눈치도 못채돌아가고 남편과 둘이서 신접 살림을 시작했다.“. 신랑자리가 갓마흔으루 상처했다잖너. 밑으루딸린 아두 없구. 일본으루“니네가 누구너? 누구네 아덜이제?”“아부지!”그러나 나는 도림동을떠날 때까지 그쪽은 쳐다도 못했다. 죽은아이가 그시어머니도 갑갑한지 내게 물었다.“이 여자가 말 함부로 하네! 대한 청년단 무서운 걸 모르는구만!”틀림없이 아들이다! 나는 이를 악물고 이렇게 생각했다.아들. 내가 드디어 아들다 낫지 않은 몸으로 서울을 떠나야 했다.도무지 뒤숭숭하고 인심 험한 서울에깜둥이가 내 앞에다 대고 손짓을했다. 나는 여전히 언 채, 그 손가락 놀림을“뭐가 이상하너?”그러나 나는 긴장해서 소리쳤다.“엄마 아퍼요?”수 없는 불안에 시달렸다.양구로 갔던 남편이 스무 날쯤 되어서 미군 트럭을 타고 제천으로 왔다.가 뭘 바래구 더 살어유? 내가 싫으문 그냥 버레유. 이렇게 패지는 말구유. 윤이질 수 없을 것이다. 아들 낳아 큰소리치